파란 물감의 남자들이 선사하는 오감만족 공연

스케일 키워 14년 만에 내한한 《블루맨 그룹》,
폭염으로 달궈진 한반도를 식힌다

민머리에 파란 물감을 뒤집어쓴 세 남자가 무대 위에서 신나게 논다. 하지만 표징은 없고, 공연 내내 말도 내뱉지 않는다. 때문에 무언극이 열리는 극장은 강렬한 타악기 퍼포먼스의 온상이 돼버린다. 현재 서울 삼성역의 코엑스 신한카드 아티움 극장에서 열리는 블루맨 그룹의 월드 투어 현장도 마찬가지다. 14년 만의 내한공연인 데다, 팬데믹으로 수년간 공연이 멈췄다가 재개된 블루맨들의 해외 나들이여서 주목을 받고 있다.

《블루맨 그룹: 튜브 1991》(이하 《블루맨 그룹》)이라는 이름의 특별한 공연이 첫선을 보인 장소는 뉴욕의 극장가 브로드웨이에서 벗어난 외곽이었다. 브로드웨이가 타임스스퀘어 주변의 관광 중심가이자 500석 이상의 대극장을 뜻한다면, 외곽의 500석 이하 소극장을 뜻하는 ‘오프 브로드웨이’는 실험성이 넘치는 공간이다. 이 공연이 개막한 1991년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공연은 스펙터클한 무대장치로 혼을 쏙 빼놓는 《미스 사이공》이었다. 그 밖에 《오페라의 유령》 《레 미제라블》 같은 영국산 글로벌 뮤지컬 작품에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반대로 특별한 무대장치 없이 아스터 플레이스 극장에서 공연하는 《블루맨 그룹》은 오로지 실험성과 독특한 콘셉트만으로 당시 기라성 같은 대작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보이며 스스로를 차별화했다.

넌버벌 퍼포먼스팀 ‘블루맨 그룹’이 6월15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아티움에서 프레스콜을 하고 있다.ⓒ뉴시스

넌버벌 퍼포먼스팀 ‘블루맨 그룹’이 6월15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아티움에서 프레스콜을 하고 있다.ⓒ뉴시스

넌버벌 퍼포먼스팀 ‘블루맨 그룹’이 6월15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아티움에서 프레스콜을 하고 있다.ⓒ뉴시스

실험성과 독특한 콘셉트만으로 존재감 선보여

우리나라에서도 1990년대 내한공연을 가졌던 비언어극 《스텀프》와 함께 이 작품은 오프 브로드웨이의 대표작으로 연일 흥행 가도를 달렸다. 특히 1990년대 말에는 밀레니엄을 앞두고 미국 뮤지컬 창작자들이 새로운 시대를 상상하고 다양한 실험을 했던 이른바 ‘미국 뉴 뮤지컬’ 작품 중 하나로 역사에 기록됐다. 1990년대 말 브로드웨이의 대표적인 뉴 뮤지컬은 《렌트》였는데, 공통적으로 오프 브로드웨이 출신이다. 천 년에 한 번 오는 아주 특별한 분위기였던 만큼, 예술가들의 과감한 도전이 평소보다 훨씬 크게 용인되고 비주류가 주류로 빨리 올라서게 하는 사다리가 만들어지는 시대였다.

세월이 흐르고 《블루맨 그룹》은 장기 레퍼토리가 되면서 투어 프로덕션이 만들어졌다. 공연 장소 역시 작은 아스터 플레이스 극장을 벗어나 전 세계 대도시의 큰 극장을 누볐다. 오리지널 프로덕션이 극장 전면을 가득 메운 PVC 파이프(튜브)를 통해 공명되는 소리와 물감을 튀기며 타악기를 연주하는 블루맨들, 라이브 밴드 등이 어우러지면서 ‘들리는 색깔’과 ‘보이는 소리’의 만남을 시도하며 관객들에게 시청각이 통합된 이색적인 체험을 선사했다면, 투어 버전은 스케일이 훨씬 커졌고 여러 다양한 막간 장면이 추가됐다.

이 작품에 출연하는 세 명의 배우는 얼굴을 파랗게 분장하고 무대에 선다. 과거 인텔 광고에도 출연해 낯익은 비주얼이다. 이러한 비현실적인 분장을 통해 배우로서의 독창적인 얼굴과 이미지를 뽐내는 것을 포기한 대신 배우가 바뀌어도 ‘블루맨’이라는 고유의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확보했다. 블루맨은 일종의 외계인 캐릭터다. 따라서 블루맨 그 자체가 피부색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사전에 제거하고 서로를 평등하게 대하는 중립적인 캐릭터를 뜻한다. 또한 인간들끼리 탐욕을 부리고 싸우다가 급기야 전쟁을 벌이는 불행한 역사의 반복을 그 씨앗인 말(言)을 버림으로써 비로소 멈출 수 있음을 우회적으로 상징한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강렬한 색채와 움직임, 음악 연주와 사운드 효과, 시시각각 바뀌는 관객들과의 즉흥적인 교감이다.

‘블루맨 그룹’ 월드투어 캡틴 버니 하스 (Barney Haas)와 제작진이 6월15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아티움에서 프레스콜을 마치 고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뉴시스

관객 참여형 공연으로 재미와 웃음 선사

배우들이 공연 중에 절대 말을 하지 않는 대신, 무대 위에는 내레이션과 해설용 텍스트가 수시로 비춰진다. 관객들에게 장면 설명과 주의사항 등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도 있지만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가령 블루맨들이 자신들의 악기인 파이프에 대한 언급을 거창하게 시작하고 관객들에게도 생각을 하도록 유도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결론을 보여주며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허망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 작품은 관객으로 하여금 텍스트를 통해 무언가를 정의하려는 시도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텍스트란 단지 이 작품에서 비주얼적인 소품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에 말이나 글로 이해하는 것보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을 귀로 즐기면 된다. 따라서 이 작품은 아이들을 동반하고 관람하기에도 적합하다. 아이들의 눈으로 편견 없이 보는 블루맨 캐릭터들은 아이들에게 게임 속 외계인 캐릭터이자 마음속에 품고 있는 친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관객 참여형 공연이라는 점이다. 작품은 쇼 형식으로 이루어져 장면별로 분절돼 있다. 마치 서커스나 과거의 보더빌 쇼처럼 개별 장면들이 옴니버스로 이뤄진 방식이다. 이러한 쇼에는 막간 장면이 존재하는데 관객 쪽의 조명을 밝히고 관객을 무대로 이끌어내 페인트칠을 하는가 하면, 게임도 하고 따로 온 남녀 관객들을 선정해 즉석에서 커플을 만들어주는 이벤트도 실시한다. 관객의 입에 실시간 중계되는 초소형 카메라를 넣으며 준비한 영상과 연결시킨 절묘한 ‘내시경 영상쇼’를 보여주기도 한다. 관객 참여 장면은 그날그날 변수가 있지만 오히려 객석에서 가장 큰 재미와 집중도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얼떨결에 무대로 불려나가 당황하는 관객의 모습을 보며 다른 관객들은 큰 웃음을 짓는 모습 자체가 이 작품의 오랜 전통이자 특별한 재미다.

하지만 《블루맨 그룹》이 오랜 기간 동안 꾸준히 사랑받을 수 있는 요인은 장르를 통합한 진정한 복합 하이브리드 장르라는 점이다. 직접 개발한 파이프 악기들과 물감이 튀는 타악기를 전면에 내세운 콘서트, 얼굴 표정만으로 희로애락을 보여주는 배우들의 코미디 액트, 움직임과 자막으로 배우들의 말을 없애 특별한 방식의 소통을 경험하게 하는 넌버벌 퍼포먼스. 이 모든 것이 이 작품의 장르를 더 이상 규정할 필요가 없게 만든다. 특히 14년 전 내한공연과 비교해 BTS의 음악과 디제잉을 추가하는 등 영상 디자인도 진일보했다.

오프 브로드웨이 오리지널 공연부터 변함없는, 마시멜로 과일 조각을 던져 한입에 먹는 퍼포먼스는 서커스에 가까운 묘기다. 음식 재료 전담 스태프가 포함될 정도다. 이러한 ‘음식 개그’는 이른바 먹방 콘텐츠가 대중화되기 이전부터 인기가 있었기에 절대 실패하지 않는 유머 코너로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말이 사라진 자리에 오감을 가득 채우는 감각을 일깨우는 이 공연은 코로나로 인해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극장 나들이를 재개하기에도 적합한 작품이다. 맨 앞자리 구역은 스플래시 존으로 파란 물감이 튀는 자리이기에 비옷을 제공한다. 공연은 8월7일까지.

This article is from https://www.sisajournal.com/, if there is any copyright issue, please contact the webmaster to delete 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