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기록 재현 위해 초호화 캐스팅으로 재결성
젊은 배우에게 주연 양보하고 원로배우 조연 물러나 주목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는 《햄릿》 《오셀로》 《리어왕》 《로미오와 줄리엣》 등 수많은 불후의 명작을 남긴 시인이자 극작가다. 그의 작품들은 희극과 비극을 넘나들며 인생의 깊이를 냉철한 두뇌와 밝은 눈으로 조망하는 명작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00년이 지났지만, 그가 남긴 작품들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변주하며 동시대 관객들에게 여전히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뮤지컬 《햄릿》 포스터 ⓒ국립극장 해오름 제공
셰익스피어 희곡 중 우리나라에서 특히 인기가 높은 작품은 단연 《햄릿》이다. 국문학자이자 연극평론가인 유민영 교수가 집필한 《한국근대연극사 신론》(태학사)에는 《햄릿》의 한국 초연 상황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6·25 전쟁의 포연이 여전히 자욱하던 1950년 11월, 오늘날 국립극단의 전신인 ‘극단 신협’이 서울 수복 후 폐허가 된 서울에서 연극 활동을 지속하다가 중공군의 남하로 대구로 피신한 이듬해 9월에 대구 키네마극장에서 어렵게 《햄릿》 초연을 올렸다. 전쟁 중이었음에도 극 중 유명한 대사인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는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만큼 가까웠던 전쟁 상황과 어우러지며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당시 연출은 이해랑 선생이 맡았으며 출연진은 김동원, 황정순, 장민호, 최무룡 등 당대 한국의 대표 배우들이었다.
6·25 전쟁 중에도 명맥 이어간 《햄릿》 공연
억울하게 죽음을 맞고 원혼이 돼 떠도는 아버지, 그 아버지를 죽인 삼촌과 결혼한 어머니, 그리고 한때는 사랑했던 연인의 자살, 그 연인의 오빠와의 가혹한 대결 등 ‘우유부단하며 고뇌하는 인간’인 덴마크 왕자 햄릿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한 가족사와 권력 싸움을 콘텐츠로 즐겨온 우리나라 관객들의 구미에도 잘 맞는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셰익스피어 공연 중 《햄릿》이 차지하는 비율만 30%다. 셰익스피어가 남긴 희곡이 총 37개임을 감안하면 절대적인 비중이다. 특히 셰익스피어 400주기였던 2016년의 경우 한 해 동안 국내에서 공연된 《햄릿》 공연은 서로 다른 프로덕션으로 20여 개에 달했다.
2016년 가장 큰 규모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공연은 셰익스피어 400주기 및 이해랑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권성덕, 전무송, 박정자, 손숙, 정동환, 김성녀, 유인촌, 윤석화, 손봉숙 등이 총출동해 펼쳤던 공연이다. 당시 좌석 점유율 100%라는 불멸의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이 배우들이 고스란히 6년 만에 국립극장 해오름 무대에 복귀해 아주 특별한 《햄릿》을 공연하고 있다.
6년 만에 돌아온 연극 《햄릿》(배삼식 각색, 손진책 연출)에는 앞서의 원로배우들이 모두 다시 출연하지만, 이번 공연은 과거와 달리 배역에서 차이가 있다. 2016년 국립극장 공연 당시 캐스팅은 ‘햄릿’에 유인촌, ‘오필리어’ 윤석화, ‘클로디어스’ 정동환, ‘거트루드 왕비’ 손숙, ‘폴로니어스’ 박정자, ‘레어티즈’ 전무송, ‘호레이쇼’ 김성녀, ‘무덤지기’ 권성덕, ‘로젠크란츠’ 손봉숙이었다. 특히 폴로니어스 역의 박정자는 성별을 넘어선 젠더프리 캐스팅으로 연극이 ‘배우 예술’이라는 원리를 재확인해준 사례였다.
배우 유인촌이 5월25일 오후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에서 열린 연극 《햄릿》 제작발표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극중극에서 애초의 정통극으로 돌아가
2016년 공연은 원로배우들이 극 중에서 연극을 다시 올린다는 특별한 극중극 콘셉트를 도입해 이들이 햄릿을 비롯한 주요 역할을 모두 소화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캐릭터에 맞는 나이대의 젊은 배우들에게 주연 자리를 넘겨주고 자신들은 조연과 앙상블 역할로 물러났다. 형식도 극중극이 아닌 애초의 정통극으로 돌아갔다. 덕분에 극 중 배역의 나이에 걸맞은 배우들을 볼 수 있게 됐다. 2016년 공연까지 도합 햄릿 역할만 여섯 번 연기했던 ‘햄릿 전문 배우’ 유인촌은 이번에는 비정한 클로디어스 숙부를 연기한다. 레어티즈였던 전무송은 유령을 맡았다. 오필리어였던 윤석화와 폴로니어스 박정자, 거트루드 손숙은 나란히 유랑극단 앙상블 배우로 등장한다.
세대교체를 한 주연들은 모두 뮤지컬과 연극에서 왕성하게 활동 중인 젊은 배우들이다. 햄릿은 강필석, 오필리어는 박지연, 레어티즈는 박건형, 호레이쇼는 김수현이 각각 역할을 책임진다. 여기에 연출 손진책, 무대 디자인 박동우, 프로듀서 박명성 등 한국을 대표하는 제작진이 6년 전과 동일하게 참여했고 배삼식 작가가 긴 원작을 쫄깃하게 줄였다.
원로배우 중에는 이번 무대가 마지막이란 각오로 비장하게 참여하고 있는 배우들도 있다. 연출가 손진책은 제작발표회에서 “고전이란 원래 통시성(여러 시대에 걸쳐 역사적으로 드러나는 특질을 갖는 것)을 가지지만 이번 공연은 오늘, 현대인의 심리로 햄릿을 보려 한다”고 말했다. 또한 이번 공연에서 ‘햄릿’을 가로지르는 기본 이미지를 ‘죽음’이라 정의하기도 했다. 연출가가 이번 프로덕션을 죽음을 가까이 들여다보는 해석으로 접근한 점은 꽤 흥미롭다. 공연을 ‘죽음 바라보기’ 측면에서 공시성(어떤 한 시기의 특질을 갖는 것)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6년 사이에 변한 것은 주역 배우들뿐만이 아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3년째 인류의 삶을 위협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 전쟁을 비롯한 살상 행위가 실시간으로 자행되고 있다. 자원 고갈과 기후위기는 이미 고질적인 문제로 언제든지 우리 삶의 동력을 멈추게 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사람들에게 위안을 줘왔던 무대 공연이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그 해답을 찾고 있는 과정에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모인 19명의 다양한 연령대 배우는 60년 전 연극 무대부터 현재 TV 매체에 이르기까지 세대와 장르를 넘나들면서 대중을 만나온 사람들이다. 지구의 존재를 위협하는 수많은 난관 속에서도 무대 공연의 가치를 추구하고 현장에서 함께 어우러지며 작품을 만들어가는 현장성이 강한 무대 예술의 특징을 이만큼 잘 보여주는 작품은 당분간 없을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 역시 ‘죽음’과 싸우고 있다. 공연이 개막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체 불가능한’ 두 배우의 코로나 확진으로 7월24일까지 공연이 멈춘 것이다. 원 캐스트 배우들로 구성돼 있어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한동안 거리 두기 완화와 확진자 감소로 잊고 있었던 ‘팬데믹의 유령’이 요즘 다시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는 느낌이다. 나름 행복했던 시기에 열심히 연습하고 무대에 힘들게 올라왔을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다. 따라서 무대가 다시 열린다면 놓치면 안 되는 아주 귀한 관람 기회가 될 것이다. 공연은 8월13일까지다.
This article is from https://www.sisajournal.com/, if there is any copyright issue, please contact the webmaster to delete 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