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텐트폴 시장에서 맞붙은 영화
《외계+인》이 문을 열어젖힌 한국 영화 여름 텐트폴 시장이 어느덧 정점을 지나고 있다. 《한산: 용의 출현》(이하 《한산》)이 개봉 8일째인 8월3일 오전 누적 관객 수 300만 명을 돌파했고, 세 번째 주자인 《비상선언》이 3일 개봉했다. 사전 예매량이 20만 장을 돌파하면서 초반 흥행의 청신호는 일단 켜졌던 상황. 말하자면 두 영화는 역사와 동시대성의 격돌이다. 임진왜란 해상 전투, 초유의 항공 테러 사이의 피할 수 없는 대결이다.
영화 《한산》의 한 장면ⓒ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한산》의 한 장면ⓒ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국뽕 너머의 국뽕’, 이순신 장군을 내세운 《한산》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명인 성웅(聖雄) 이순신은 그 이름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존재다. 동시에 여전히 궁금한 대상이기도 하다. 영화 《성웅 이순신》(1971)과 TV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2004, KBS) 등을 포함해 문학과 영상 매체를 아우르며 여러 차례 재해석된 이유일 것이다. 어쩌면 혼란의 시대가 그를 꾸준히 소환하는지도 모른다. 1760만 명이라는 기록적인 관객 수를 남긴 《명량》(2014)의 개봉 당시에 ‘이순신 리더십’을 중심으로 한 신드롬이 일었던 건, 당대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떨어뜨려 생각하기 어렵다.
《한산》은 김한민 감독이 계획한 ‘이순신 3부작’ 가운데 두 번째 영화다. 최민식에 이어 박해일이 이순신을 연기했다. 이후 이어질 《노량: 죽음의 바다》는 이미 촬영을 마쳤으며, 김윤석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순신 장군이 진두지휘했던 세 번의 중요한 전투를 각기 다른 세 명의 배우를 통해 조명해 보는 것. 이 전무후무한 프로젝트는 3부작을 종합적으로 바라봐야만 이순신이라는 인물의 초상을 조금이나마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지 않겠냐는 일종의 제언과도 같다. “‘국뽕 너머의 국뽕’을 추구한다.”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것이 ‘국뽕’의 기능이라면, 김한민 감독의 이 같은 자신감은 납득 가능한 구석이 있다.
영화의 배경은 시간상으로 《명량》보다 5년 앞선 1592년이다. 전작의 이순신이 육체와 정신 모두 극심한 피로에 시달리는 백전노장이었다면, 《한산》의 이순신은 아직 젊고 침착한 전략가다. 《한산》은 임진왜란 당시 장군이 가장 크게 승리했던 것으로 알려진 한산도대첩으로 향하는 과정과 결과를 담는다. 극의 초반, 이순신은 왜군을 크게 격파한 사천해전에서 총상을 입는다. 이때 입은 내상은 전쟁 내내 장군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천에서 거북선의 존재를 파악한 왜군은 이를 전설 속 괴물 ‘복카이센’에 빗댄다. 그들에게 이순신과 거북선은 그만큼 커다란 두려움이다. 반면 지상전인 용인 광교전의 전투는 왜군이 승기를 잡은 상황. 임금 선조가 여주로 파천한 소식이 알려지면서 조선군의 기세는 휘청댄다. 나라가 통째로 함락당할 위기 앞에 바다를 수호해야 하는 장군의 고뇌는 깊어진다.
인물을 다루는 방식에서 《한산》은 《명량》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을 취한다. 《명량》의 이순신이 천하를 호령하는 불같은 기운의 장수였다면, 《한산》의 이순신은 모든 상황을 비추는 물과 같다. 그는 앞으로 나서기보다 한발 물러나 있다. 그렇다고 존재감이 작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영화 속 이순신은 큰 산을 뜻하는 ‘한산(閑山)’처럼 거대하게 전체를 아우른다. 그러는 사이 장군의 진영은 ‘팀’ 전체의 활약으로 묘사된다. 장수 어영담(안성기), 전라 우수사 이억기(공명)를 비롯해 장군을 보좌한 수많은 이의 이야기는 이순신을 둘러싼 배경이 아닌 하나의 또렷한 사연으로 다가온다. 거북선의 개발자 나대용(박지환), 이순신과 갈등을 빚는 경상 우수사 원균(손현주) 등의 인물도 마찬가지다.
조선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해 왜군을 평면적 무뢰한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점 역시 《한산》의 좋은 전략이다. 오히려 적군이 강력할수록 다가올 전투를 향한 기대감은 높아간다. 본격적인 해상 전투를 제외한 나머지 장면들은 장수들이 벌이는, 나라의 운명을 건 치열한 첩보전이다. 이순신은 실전 투입에서 얻은 거북선의 문제점을 파악해 수정하는 동시에, 한산 앞바다에 ‘바다의 성’을 짓는 학익진을 펼쳐 승리할 수 있는 지략을 짠다. 장군이 과묵한 차분함을 유지하는 사이 영화의 흐름은 오히려 왜군의 수장 와키자카(변요한)의 시선과 말을 적극적으로 경유한다. 왜군이 조선군에 위장 잠입해 거북선 설계도를 훔쳐내는 등 공격적 작전을 펼치는 사이, 조선에서는 투항한 항왜 군사(김성규)가 정보원 노릇을 한다. “이 전쟁은 무엇입니까.” 그의 질문에 장군이 답한다. “의(義)와 불의의 싸움이지.” 올바름을 지향하는 것. 영화는 그것이 이순신의 방식이었다고 말한다.
《명량》 역시 해상 전투 묘사에서 합격점을 받은 영화였지만 《한산》은 기술적으로 훨씬 발전한 인상을 남긴다. 실제로 이번에는 바다에 직접 배를 띄우지 않고 모든 해상 촬영을 마쳤다. 기록 그대로를 재현했을 거라는 짐작과는 달리, 전투와 거북선 활용에 대한 기록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기록의 재구성에 감독의 상상력을 더해 만든 후반 50분가량의 한산도대첩 장면의 스펙터클은 압도적이다. 여기까지 가는 초중반의 리듬이 조금 늘어진다는 것과 일부 캐릭터의 단선적 활용이 아쉬움으로 꼽힐 만하지만, 연출과 연기 그리고 기술 파트에 이르기까지 최선의 전술과 기량으로 빚은 결과물로 다가온다는 것은 《한산》의 분명한 강점이다.
영화 《비상선언》의 한 장면ⓒ㈜쇼박스 제공
영화 《비상선언》의 한 장면ⓒ㈜쇼박스 제공
‘오늘날 재난의 속성은 무엇인가’ 《비상선언》의 고민
한재림 감독이 연출한 《비상선언》의 무기는 분명하게 감지되는 동시대성이다. 영화가 그리는 사건은 1만8000피트 상공 위 항공기 테러라는 초유의 재난이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스크린 밖 현실과 밀접하게 닿아있다. 특히 바이러스로 퍼지는 전염병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코로나19 팬데믹 상황과 강력하게 연결된다.
하와이를 향해 가는 KI501 항공편에는 딸과 함께 탑승한 재혁(이병헌)을 비롯, 수많은 승객이 타고 있다. 베테랑 형사팀장 인호(송강호)의 아내도 친구들과 오랜만에 떠나는 해외여행으로 들떠 있다. 재혁은 공항에서부터 수상쩍게 행동하던 진석(임시완)의 존재가 신경 쓰인다. 비행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승객 중 한 명이 피를 토하며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것이 기내에 치명적 바이러스가 유포된 결과임이 밝혀지면서 기내는 아수라장으로 변모한다. 지상에서는 이를 테러로 규정, 국토교통부 장관 숙희(전도연)를 중심으로 비행기를 안전하게 착륙시키려는 이들의 분투가 시작된다.
‘비상선언’은 재난 상황에 직면한 항공기가 더 이상 정상적 운항이 불가능할 때 무조건적 착륙을 요청하는 비상사태를 뜻한다. 탈출 자체가 불가능한 상공의 기내에서 치사율 높은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승객의 안전을 책임질 기장과 승무원들마저 속수무책으로 감염되는 상황. 부기장(김남길)은 결국 비상선언을 내린다.
영화는 기내와 지상을 번갈아 오가며 이야기를 펼친다. 한재림 감독은 재난 자체의 풍경보다 중요한 것은 이를 둘러싼 선택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실제로 그는 언론시사회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우리가 재난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위대한 희생보다 사소한 인간성에 있지 않을까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극 중 인물들은 모두 다른 선택을 한다. 자신보다 타인의 안전을 먼저 염려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감염 증세가 발현된 이들을 격리하는 데 혈안이 된 이도 있다. 비상착륙하려는 항공기의 상황을 둘러싼 국제 정세 역시 긴박하게 돌아간다. 승객들의 안전한 착륙을 우선해야 하는 숙희의 입장과,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바이러스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타국의 입장이 팽팽하게 맞선다.
애초에 테러범의 정체와 의도가 크게 중요한 영화는 아니다. 이는 영화 초반에 모두 밝혀진다. 범인은 예상대로 진석이며, 그는 사건을 촉발하는 역할에 충실한 뒤 빠르게 퇴장한다. 핵심은 영화가 이 인물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재난의 속성이다. 진석은 처음부터 면밀하게 목표를 정한 것이 아니다. 공항에 도착한 뒤 승객이 가장 많이 탈 법한 행선지와 편명을 고른 게 전부다. 애초에 목적지가 하와이가 아닌 다른 곳이었다 해도 상관없다. 그가 다른 비행기에 탑승했다면 테러는 전혀 다른 이들에게 일어났을 것이다. 단지 우연히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 오늘날의 재난이 발생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무차별적인 공포다.
중반까지 속도감을 앞세운 스펙터클로 탄탄한 짜임새를 보여주던 《비상선언》은 점차 재난 상황에서 오직 ‘인간이기에’ 택할 수도 있는 어떤 가능성이자 사회적 성숙함을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가족애이자 나아가 인류애에 기반한 이 숭고하기까지 한 선택은 이 영화가 다른 재난영화와 달리 스스로 가질 수 있다고 믿은 차별점이기도 하다.
중요한 건 항공 테러로 시작한 영화적 외피가 어느 순간 한국 사회의 국가적 재난 중 하나인 세월호를 직간접적인 방식으로 강하게 환기시키는 방식으로 탈바꿈한다는 점이다. 물론 일정 부분 납득 가능한 연결이지만, 과연 가장 적절한 방식이었는가 하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과정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재난 앞에 선 인간 본성을 향한 질문과 답이 좀 더 치밀하게 다듬어졌어야 한다. 비상선언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엄중한 긴급함이 무색하게 여러 차례 되풀이해 분절 제시되는 듯한 결말 구조 역시 신선함보다는 피로감을 더 크게 안긴다. 《비상선언》이 택한 ‘다름’은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여름 텐트폴 시장의 마지막 주자
2022년 여름 한국 영화 텐트폴 마지막 주자는 8월10일 개봉하는 《헌트》다. 배우 이정재가 연출과 주연을 겸했고, 올해 칸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섹션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되며 화제를 모았다. 《태양은 없다》(1998) 이후 23년 만에 한 작품에서 호흡을 맞춘 이정재와 정우성의 만남으로도 주목도가 높은 작품. 1980년대 안기부 요원들 사이에 벌어지는 스파이 색출 작전을 그린 이 영화는 존 르 카레 첩보물의 분위기에 마이클 만 감독 작품을 연상시키는 총기 액션을 엮어낸다. 언론시사회 직후 반응이 뜨거웠던 만큼 흥행 역시 기대해봄 직하다.
This article is from https://www.sisajournal.com/, if there is any copyright issue, please contact the webmaster to delete 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