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선언》으로 3년 만에 스크린 컴백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이어 이번엔 스크린이다. 이병헌이 ‘평범한 아빠’로 돌아왔다. 영화 《비상선언》은 사상 초유의 테러로 항공기가 무조건적 착륙을 선포한 재난에 맞서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다. 의문의 남성이 비행기에 탑승한 후 원인불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지난해 개최된 제74회 칸국제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공식 초청된 바 있으며,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개봉이 1년 가까이 밀렸다. 올 초 개봉을 추진하기도 했지만 엔데믹 시기를 맞은 올여름 시장에서 관객들과 만나게 됐다. 극 중 이병헌은 딸아이의 치료를 위해 비행기에 오른 탑승객 재혁 역할을 맡았다. 비행 공포증을 가진 전직 파일럿 출신으로 의문의 남성과 같은 비행기를 탄 사실을 알고 의심과 불안에 빠지지만, 혼란한 상황 속에서 자신이 할 일을 깨닫고 행동하는 인물이다. 영화는 《연애의 목적》(2005), 《우아한 세계》(2007), 《연애의 온도》(2013), 《관상》(2013), 《더 킹》(2017) 등 다채로운 작품을 발표해온 한재림 감독이 5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이다. 주연배우 이병헌과 함께 영화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BH엔터테인먼트 제공
오랜만에 스크린을 통해 관객들을 만났다.
“끊임없이 작품을 하고 무대 인사를 하는 것이 어느 순간부터 제 일상이 됐는데, 코로나19를 겪으면서 그 루틴이 깨졌다. 관객과의 소통 없이 촬영만 하며 몇 년을 보냈다. 아마 《남산의 부장》(2019) 이후 관객을 직접 만나는 게 처음일 것이다. 며칠 전 시사회에서 관객을 만나 인사하는데 여러 감정이 들더라. 늘 하던 일인데도 새삼 ‘아, 이게 내 일이지’ ‘참 감사한 일이구나’ 하며 복받쳐 오르더라.”
송강호, 전도연, 김남길 등 이른바 연기 잘하는 배우가 대거 출연한다.
“함께 호흡하는 출연진이 훌륭한 배우들일 때 자신감도 더 생긴다. 작품을 찍을 때 결과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은데, 심적으로 의지도 된다. 영화가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크기에 더 신나게 일할 수 있는 동기부여도 된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으로 촬영했다.”
연기를 하면서 주안점을 둔 것은 무엇인가.
“재혁은 비행기만 타도 신경안정제가 필요한 캐릭터다. 공황장애가 있다. 관객들에게 그 고통을 느끼게 해야 하는 게 배우의 임무다. 과거에 내가 겪어본 증상들이기도 해서 리얼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20대 때 SBS 드라마 《아름다운 그녀》를 끝내고 미국에 가려고 비행기를 탔을 때 처음 공황장애를 느꼈다. 그 기억이 지금까지 선명하다. ‘여기서 죽는구나’ 싶었다. 너무 힘들어서 당시 기내 방송을 통해 의사 선생님을 찾기도 했다. 다행히 미국까지 잘 갔지만,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지난 3년간 전 세계가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전대미문의 재난을 겪었다. 팬데믹을 겪은 한 사람으로서 ‘재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재난은 예측할 수 없다. 누구에게나, 언제든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 극단적인 상황과 맞닿았을 때 여러 인간 군상이 있을 것이고, 또 인간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겨내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이기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도 하고, 인간적인 면이 보여지기도 한다. 재난은 예측할 수 없지만 결국 어떻게 헤쳐 나가느냐의 문제인 것 같다. 영화를 찍으면서도 끊임없이 질문했다. 나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사실 저는 이 영화뿐 아니라 모든 다른 영화에서도 나를 대입시켜 본다. 결론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답을 찾았다면 그게 거짓말일 수도 있다.”
덧붙여 팬데믹 기간에 영화계 상황들을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도 궁금하다.
“영화 관련 종사자라면 누구나 ‘과연 극장이라는 곳이 지속될까?’ ‘극장이 없어지고 OTT 시대가 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해봤을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한데 최근에 영화가 개봉되고, 또 큰 사랑을 받은 영화들을 보면서 희망적인 생각을 하게 됐다.”
한재림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
“그간 한 감독과 작업할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 상황이 닿지 못했다. 하지만 감독님의 여러 작품을 보면서 언젠가는 꼭 작업을 함께 하고 싶었다. 막상 해보니, 이렇게까지 집요한 사람인지 몰랐다(웃음). 본인이 원하는 것을 끝까지 찾아내고, 반대로 어떤 면에서는 또 굉장히 쿨해서 놀랄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아주 중요한 장면인데 단 한 번에 시원하게 오케이 한다. 자기가 원하는 걸 확실히 알고 있다. 좋은 장면이 나올지 몰라 이것저것 계속 찍어보는 스타일이 아니다. 자기 것이 분명한 것이 좋았다.”
같이 출연한 임시완에 대해 칭찬을 많이 했다. 극 중 두 사람의 케미는 어땠나.
“임시완은 극 중에서 불길한 기운을 관객들에게 주는 캐릭터다. 그 예쁘장하고 착한 얼굴로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데 놀랐다. 《비상선언》 팀의 막내로 촬영장에서 귀여운 역할을 톡톡히 해내기도 했다. 항상 궁금한 것이 많고 엉뚱한 질문을 하는 친구다.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고민하게 만드는 질문들을 던진다. 문자로도 질문을 많이 한다. 하하. 저희 집에도 자기가 먼저 가면 안 되겠냐고 물어보는 엉뚱한 친구다. 가끔 만나 밥도 먹고 술도 한잔하고 있다. 무엇보다 연기를 잘한다.”
함께 기내에서 촬영한 김남길은 어땠나.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된 채로 현장에 오기 때문에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에는 누구보다 진지하게 몰입한다. 또 컷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유쾌해지는 친구다. 현장의 분위기 메이커였다. 그리고 내가 어떤 농담을 던지든 가장 크게 웃어준다. 저에겐 좋은 관객 같은 존재랄까. 주변 사람을 웃게 만드는 유쾌한 기운을 가진 사람이라 덕분에 많이 웃고 떠들었다.”
영화 《비상선언》의 한 장면ⓒ㈜쇼박스 제공
극 중에서 진한 부성애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나도 아이를 키우는 아빠의 입장에서,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아이를 대하는 아빠의 입장은 누구보다 확신을 가지고 연기했다. 다만 저는 아들을 키우는 아빠이고, 극 중에서는 딸이었다. 딸을 가진 아빠는 많이 다르다고 들었다. 지인 중에도 딸을 가진 아빠가 많아서 캐스팅 이후엔 나도 모르게 딸 가진 아빠들의 모습을 관찰하게 되더라. 아들을 가진 아빠는 힘이 많이 드는 육아를 하는 것에 비해 딸을 가진 아빠는 말로 조근조근,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육아를 하더라. 눈빛, 손짓, 말투부터가 다르다. 확실히 부드러웠다.”
아들을 키우는 아빠 이병헌은 어떤 사람인지도 궁금하다.
“저는 딱 아이의 나이에 맞춰 친구처럼 놀아주려고 노력하는 아빠다. 어른의 입장이 아닌 그때 그 나이의 감수성으로 돌아가서 아이를 대한다.”
《비상선언》에 많은 배우가 참여해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줬다. 스크린으로 봤을 때 가장 기억에 남았던 배우는 누군가.
“송강호 배우의 연기를 보면 그냥 지나갈 법한 연기인데도 ‘저걸 저렇게 만들어내는구나’ 하고 감탄할 때가 있다. 별거 아닌 대사인데 웃음을 주거나 또 울컥해지는 연기를 한다. 의외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배우랄까. 임시완 배우의 연기 역시 놀라웠다.”
《비상선언》을 한 문장으로 말한다면.
“청룡열차? 아, 요즘 말로 하면, 롤러코스터인가? 하하. 영화는 관객의 입장에서 시작한다. 비행기에 탑승하는 순간부터 끝날 때까지 스릴 있게 한 번에 달려간다. 그런 의미에서 롤러코스터 같은 작품이다.”
최근 이정재씨가 영화감독으로 입봉했다. 필모그래피를 보면 연출에 대한 욕심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할 줄 아는 게 이거다. 나는 전체를 아우르는 아이디어나 창의력이 부족하다. 용기도 없다.”
쉼 없이 작품을 하고, 언제나 좋은 연기를 한다. 에너지의 원천은 어디서 오나.
“호기심이다. ‘이 이야기와 이 캐릭터는 왜 이렇게 흘러가고 왜 이런 행동을 할까’ 하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호기심과 관찰에서 에너지가 비롯되는 것 같다. 덧붙여 이 인물을 내가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스스로에 대한 궁금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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