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현대미술에 첨단 기술을 입히다

미술계 영향력 1위 《히토 슈타이얼: 데이터의 바다》 서울에서 열려
메타버스 등 활용해 데이터 사회의 부조리 풍자

한 미술매체에서 2017년 동시대 미술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에 꼽힌 일본계 독일인 여성 미술가의 개인전이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히토 슈타이얼: 데이터의 바다》(2022년 4월29일~9월18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는 이 작가의 아시아 첫 개인전이다.

그의 미디어 작업을 주제별로 배치한 전시실 가운데 ‘소셜심(SocialSim)’이란 제목의 5채널 영상물이 놓인 방에는 관객이 가장 많이 들어차 있었다. 암전된 방을 둘로 나눠 한쪽에선 벽 4면에 투사하는 4채널 영상을 틀고, 다른 한쪽에는 주제를 다루는 1채널 영상이 나온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재현한 시위진압 경찰과 군인들의 군무 장면이 테크노 음악과 함께 연거푸 투사되는 4채널 방은 클럽 같은 분위기다. 춤추는 군경의 모습에 대해 ‘팬데믹 이후 대중의 시위와 진압부대의 모습을 사회적 안무로 번역했다’는 전시 해설 글이 납득이 가진 않았지만, 적어도 젊은 관객층이 인스타에 올리기에 최적의 포토존 역할을 하는 전시실이긴 했다.

드러누워 작품을 관람하는 관객들ⓒ반이정·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전시장 앞에 선 히토 슈타이얼ⓒ반이정·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미술관이야? 클럽이야?

다른 전시실에는 관람객이 누운 채로 작품을 관람하도록 좌식 소파를 비치해 놨다. 모든 작업마다 충분히 정치적인 메시지가 실렸지만 쉽게 전달되진 않을지언정, 전시실을 채운 클럽의 흥취를 지루하지 않게 잠시나마 즐기다가 나갈 만한 미디어 전시였다.

전시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히토 슈타이얼은 알고리즘에 의해 장악되거나 조작되는 데이터 사회와 인공지능(AI)의 활용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그를 영향력 면에서 1위 미술가에 올린 배경은 아마도 알고리즘이나 빅데이터, 메타버스처럼 그의 작업을 읽는 주요 키워드가 미술 고유의 화두가 아니라, 세계 도처의 일상을 지배하는 현실의 키워드인 탓이리라. 예술과 기술의 차이에 대해 전자가 심미적인 자기 목적성과 관계하고 후자가 실용적인 목적성과 연관된다고들 믿겠지만, 둘의 어원은 한 뿌리에서 왔다. 르네상스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발명품을 고안하는 고차원 기술자였고, 현대 비디오 아티스트는 뉴미디어를 창작 도구로 사용하면서 미술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라보게 만든 점만 봐도 확인되는 사실이다.

미술 작가의 일반적인 이력을 따르지 않았던 히토 슈타이얼은 빅데이터 인공지능 알고리즘과 관련한 논문과 저서를 낸 이론가로 알려져 있다. 예술이 현실의 반영이라는 세간의 상식을 고려할 때, 오늘날 최적의 미술가란 미대 출신이 아니라 현재 삶과 실시간으로 연결되는 컴퓨터공학 전공자여야 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내가 최근 방문한 어느 미술 창작 스튜디오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입주 작가를 만나기도 했다. 그는 미술 전공자라면 상상하기 어려웠을 인공신경망 기술을 차용해 오늘날 SNS의 검열 알고리즘을 풍자적으로 다룬 작업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삶과 맞닿은 미디어 사회의 작동 원리를 다룬 히토 슈타이얼의 작업이 동시대 관객에게 매끄럽게 이해되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전시에 대한 리뷰를 여럿 검색해 보니 내용 파악엔 실패한 것으로 보이는 방문기들이 잡힌다. 작품을 보다가 중도에 전시실을 떠나서일 수도 있고, 부자연스러운 번역 때문일 수도 있고, 사용자의 관심 패턴을 근거로 최적의 편의를 제공하는 빅데이터가 사용자를 부지불식간에 신자유주의에 예속시킨다는 ‘빅브러더 이론’이 너무 익숙해 작업의 메시지가 새롭지 않게 다가와서일 수도 있겠다.

히토 슈타이얼과 그의 동료 2명이 출연하는 비디오 설치물 《미션 완료: 벨란시지》를 보자. 세 사람이 번갈아 단상에서 자유시장경제나 소셜미디어, 빅데이터의 부정적인 파급력에 관해 테드 강연 스타일로 강의를 한다. 이 스크린 작업은 자칭 ‘강연 행위예술’ 정도로 풀이될 렉처 퍼포먼스라고 소개됐다. 이처럼 누구나 대충 내용을 아는 뉴미디어의 위험성에 관해 가르치는 투의 강연 작품을 내놓는 건 관객에게 흡인력을 주지 못한다. 작가 스스로 자신의 ‘깨어있음’을 전시하는 효과만 줄 뿐이다. 전시된 히토 슈타이얼의 여러 미디어 작업이 알고리즘 신자유주의 빅데이터를 바라보는 단편적인 논조를 짧게 나열 편집했다는 인상을 주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전시기획자의 입장에서 사회 현안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미술작품은 주제의 선명성과 공공성 같은 명분을 갖춘 탓에 환영할 대상이기 쉽다. 비엔날레 같은 대형 미술 기획전의 주제가 하나같이 국제적인 이슈를 내거는 데엔 그런 이유가 있다. 작품도 난해하건만 그 작품을 훨씬 더 난해하게 풀이한 장문의 해설을 전시장 벽에 써놓는 관행은 현대미술 전시장에서 익숙한 풍경이 됐다. 현대미술(글)은 본래 어려운 것이려니 하는 우리 안의 무감한 공감대가 이런 관행을 자리 잡게 한다.

히토 슈타이얼 소셜심 《SocialSim》 2020ⓒ반이정·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히토 슈타이얼 《Hell Yeah We Fuck Die》 2022ⓒ반이정·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선동과 예술의 차이

전시의 제목처럼 데이터의 바다가 된 오늘날, 개인의 선호도를 수집·분석해 시장경제의 노예로 만들어 정치학자 렉 휘태커의 표현처럼 ‘개인의 죽음’은 현실이 됐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개인정보 보호가 금과옥조인 것은 아니다. 절대 다수의 사람이 자신의 개인정보를 서비스를 받기 위해 제공한다. 빅데이터와 알고리즘 기술은 불특정 개인의 정보를 수집·분석해 효율적인 대중교통 이용 정책을 만들거나, 범죄율을 낮추거나, 기상재해를 예방하는 데 쓰인다. 빅데이터의 바다에는 명암이 있다. 다수를 손쉽게 통제해 소수의 이해를 도모한다는 평가도 있지만, 삶을 윤택한 지평에 올려놓는 면도 있다. 기본적으로 주류 미술의 최전선에서 이슈 파이팅으로 주목받는 작가 중에는 ‘패션 좌파’가 많다. 하나의 현상에서 그림자 진 이면을 시시콜콜 짚어내, 정치적 올바름의 발언대처럼 성토하는 창작행위. 이런 미술이 부조리를 청산하는 실행파일이 되진 못한다.

아이러니하게 바로 그런 사정 때문에 예술을 예술이게 만든다. 세상을 당장 뒤집을 것처럼 덤비는 어떤 창작물은 예술이 아니라 선동이다. 예술은 싱겁더라도 해방구로 기능할 때 의미가 있다. 데이터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양 보이던 히토 슈타이얼의 전시장이 한시적인 클럽과 포토존이 돼준 것처럼 말이다. 기본적으로 미술가를 초대해 전시회를 여는 주류 기관의 성향은 우파적이다. 좌파와 우파 사이의 갈등 없는 공존이 현대미술계에서 가능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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