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전체가 부실화…재벌 규제 완화할 때 아냐”

[인터뷰]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대기업 소유지배구조 개선 위한 규제 호소

재벌 개혁론자인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대기업 계열사 상당수가 자본잠식 상태에 빠진 현 상황을 결코 등한시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자본잠식은 한계기업보다 더 나쁜 상태”라면서 “자본잠식에 빠진 회사들의 성격과 전체 대기업집단에 미칠 영향 등을 잘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자본잠식이 부당지원, 사익편취 등 재벌 총수 일가의 불공정거래 행위와 관련 있을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박 교수는 “많은 국내 재벌기업이 부당지원과 사익편취 등 일감 몰아주기를 통한 성과에 안주하면서 제조업 혁신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경직된 재벌 소유지배구조 때문에 탄소중립으로 가기 위한 산업 전환도 요원하다”며 “늦었지만 이제라도 경제력 집중 해소와 제대로 된 거버넌스 기제 가동을 통해 총수 일가의 일탈을 견제하고 개별 기업은 물론 국가 산업 전반의 성장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박 교수와의 일문일답이다.

ⓒ시사저널 최준필

대기업 계열사의 자본잠식을 왜 심각하게 봐야 하나.

“손실만 계속 보고 있다는 의미인 자본잠식은 돈을 벌어 3년째 이자조차 갚지 못하는 한계기업보다 더 안 좋은 상태다. 한계기업은 대출을 상환할 수 있느냐 없느냐, 즉 캐시플로(현금 흐름)의 문제다. 자본잠식은 이런 차원을 넘어 적자 폭이 커져 잉여금이 바닥나고 납입 자본금마저 마이너스가 되는 것이다.”

탄탄한 대기업의 계열사가 자본잠식에 빠지고 있다는 사실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자본잠식에 빠진 계열사들의 형성 과정, 각 대기업집단에서 차지하는 영향력 등은 천차만별이다. 해당 회사들이 대기업집단의 재무 건전성과 미래에 어떤 위협을 가할지, 왜 자본잠식이 발생했는지, 대주주와의 연관성은 없는지 등을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자본잠식이 부당지원, 사익편취 등 재벌 총수 일가의 불공정거래 행위와 무관치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자본잠식에 빠졌거나 일감 몰아주기로 문제가 된 대기업 계열사 중 규모가 작고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 많다. 그런 회사들을 통해 총수 일가가 눈에 띄지 않게 불공정 행위를 할 여지가 커진다. 작은 규모의 사업이란 점은 지난 5월 대한항공이 계열사(싸이버스카이, 유니컨버스) 일감 몰아주기 과징금을 놓고 공정거래위원회와 벌인 소송전에서 최종 승소한 데서 볼 수 있듯, 법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게 해준다.”

총수 일가가 크고 작은 계열사들에서 문어발식으로 임원 자리를 차지하거나, 급여와 퇴직금을 지나치게 받아가는 행위도 부쩍 눈에 띄는 추세다.

“총수 일가가 일감 몰아주기를 할 여력이 없어지면 마지막으로 빼먹는 게 급여와 퇴직금이다. 회사 사정이야 어떻든 과도하게 급여·퇴직금을 받아 또 다른 방식으로 사익을 편취하는 것이다. 총수 일가의 전횡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한국 재벌 체제에선 작동하지 않는다. 총수 일가의 지나친 급여·퇴직금 수령은 법적으로도 막을 방법이 없다.”

일련의 문제들은 결국 대기업의 소유지배구조에서 야기됐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 총수 일가가 적은 지분으로 계열사 간 복잡한 출자 관계를 이용해 이른바 ‘황제 경영’을 하는, 재벌 소유지배구조 문제가 근본 원인이다. 지난 20여 년간 사외이사제도, 이사회 의결권 범위 확대, 주주대표소송 등 기업 거버넌스 기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총수 일가의 전횡은 더욱 심해졌다. 이는 개별 대기업뿐 아니라 국가 산업 전체의 경쟁력을 후퇴시켰다.”

산업 경쟁력 후퇴는 어떤 식으로 나타나고 있나.

“전자상거래 등 기업·소비자 간 거래(B2C) 분야에서 하루가 다르게 혁신이 일어나는 것과 달리 전통 재벌기업이 포진된 기업 간 거래(B2B) 분야는 잠잠하다. 중간재 사업, 즉 제조업에선 혁신할 기회도 유인도 전혀 없다시피 한 실정이다. 재벌 소유지배구조 때문이다. 총수 일가는 급격한 사업 재편으로 자신들의 지배권이 흔들리는 상황을 원치 않는다. 이런 구조는 탄소중립으로 산업 패러다임이 바뀌는 가운데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고 있다. 지금은 우리나라 기업과 산업이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선 때다. 재벌 소유지배구조를 바꿔 신축적으로 산업 전환에 대응하지 못하면 개별 기업의 경쟁력이 쇠퇴함과 동시에 국가 산업 공동화까지 초래될 수 있다.”

서울 중구 남산공원에서 바라본 종로 지역의 대기업 빌딩숲ⓒ시사저널 최준필

재벌 소유지배구조의 바람직한 변화 방향은.

“이스라엘의 반경제력집중법을 벤치마킹해야 한다. 출자구조를 2층으로 축소하는 경제력 집중 해소 정책을 통해 재벌 소유지배구조를 단순화하고 탄소중립 시대에 걸맞게 대기업들이 스스로 바뀌도록 유인할 수 있다. 역시 이스라엘에서 처음 도입한 MoM(Majority of Minority·소수주주동의) 제도도 좋은 사례다. MoM은 대주주와 회사 간 이해충돌이 발생하면 대주주를 제외한 나머지 주주들의 투표로 의사를 결정하는 제도다. 법령이 아닌 주주 자치를 통한 방식이라 훨씬 친(親)시장적이고 저비용·고효율이라 할 수 있다.”

정부에 제언하고 싶은 부분은.

“윤석열 정부가 진정한 친시장·친기업 정부라면 반경제력집중법, MoM 제도 등이 도입되도록 발 벗고 나서야 한다. 그러나 현 정부는 경직된 재벌 소유지배구조와 산업 패러다임 변화를 외면한 채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더 강화하기 위한 규제 완화를 하는 형국이다. 최근 정부의 규제 완화에 재벌 기업들이 투자로 화답한다는 식의 언론보도가 많이 나오는데, 허망한 얘기일 뿐이다. 일본과 유럽 등 우리와 비슷한 산업 성장 전략을 폈던 나라들의 사례를 종합적으로 비교해 보면, 재벌기업을 중심으로 투자가 일어나 성장한다는 스토리는 이미 수명을 다한 지 오래다. 무턱대고 규제를 완화할 때가 아니다. 재벌이라는 경제력 집중 상태로 인해 진입과 퇴출에 엄청난 어려움이 있는 점에 메스를 대야 한다. 규제 완화 대신 경제력 집중을 해소하는 규제를 해야만 경쟁과 혁신이 생겨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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